현재의 경쟁력 vs. 미래의 지속가능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서다.
ESG 공시제도의 선두주자였던 EU는 2025년 2월, ‘EU의 경쟁 나침반(Competitiveness Compass)에 관한 커뮤니케이션’에서 지속 가능한 금융 보고, 지속가능성 실사 및 Taxonomy 분야에서 광범위한 간소화를 포함한 최초의 ‘Simplification Omnibus Package(이하 ‘옴니버스 패키지)’를 발표했습니다. 옴니버스 패키지는 행정 규제 준수 비용과 보고 부담을 축소하기 위하여 공시대상 기업을 대폭 줄이고 시행 시점을 2년씩 늦추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EU는 지속가능 규제에 대한 속도 조절과 구조 재설계를 동시에 추진하는 전환기에 들어섰습니다. 다만 현재 옴니버스 패키지의 규제 간소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가 추진되고 있으나,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에서의 혼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WeAreEurope의 ‘CSRD의 보고 요건 완화’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현재의 CSRD에 대해 다소 또는 매우 만족한다고 응답했고, 단 17%만이 불만족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CSRD의 주요 강점에 대한 질문에 응답자의 89%는 ‘투자자 및 기타 이해관계자를 위한 ESG 투명성 향상’을 꼽았으며, 89%는 ‘기업의 ESG 전략, 위험 평가 및 영향 관리 강화’라고 대답했습니다. 또한, 88%는 CSRD가 유럽의 기업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환경적 비전과 부합한다고 답했으며, 80%는 유럽의 지속가능성 목표 달성을 지원하는 효율적인 도구라는 점에 동의했습니다.
한편, 옴니버스 패키지에 대한 EU 경제통상위원회(ECON) 제안 초안은 상장사의 CSRD와 CSDDD 기준을 직원 3,000명(옴니버스에서는 500명 → 1,000명 이상으로 대상 기업 축소), Non-EU기업의 역내 순매출을 1억 5천만 유로에서 4억 5천만 유로로 상향 조정하는 등 해당 규정의 적용을 받는 기업 수를 더욱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동 위원회는 CSRD 적용 대상 기업이 보고해야 하는 지속가능성 정보의 엄격한 제한을 제안했는데, 의무 ESRS 데이터 포인트 수를 100개, 자발적 데이터 포인트 수를 50개로 제한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이처럼 EU에서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 사이 기존 ESRS의 유지 혹은 강화와 옴니버스 패키지 제안을 두고 당분간 논란이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옴니버스 패키지는 기업의 지속가능성 관련 규제 대응 부담을 완화하면서도 지속가능성 보고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여, 지속가능경영의 본질은 변함이 없을 것으로 예측됩니다.
한 걸음 물러선 연방정부, 가야할 길을 가는 주 정부와 기업
미국의 ESG 공시 제도는 서로 다른 두 흐름이 동시에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2024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대형 상장사의 기후정보 공개를 의무화하는 규칙을 최종 확정했지만, 2025년 트럼프 행정부의 복귀 이후 연방 차원의 기후공시 의무화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거세졌습니다. 결국, SEC는 2025년 2월 기후공시 의무화 규칙에 대한 법적 방어를 중단하기로 했습니다.
그렇다고 미국 전역에서 ESG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는 연방정부의 기후정책 후퇴에도 독자적인 기후변화 대응을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캘리포니아주의 대기자원위원회(CARB)는 2025년 5월 기후 공시법과 관련한 다양한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향을 논의했습니다. 그 결과, 캘리포니아주는 기후공시법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하고, 매출 10억 달러 이상 기업의 경우, 2027년부터 Scope 3까지 보고를 의무화하기로 했습니다. 뉴욕주 역시 2025년 1월, 두 개의 기업 기후공시 관련 법안(SB 3456, SB 3697)을 발의하며, 미국 내 설립된 기업 중 뉴욕에서 사업을 영위하며, 직전 회계연도 총 매출이 10억 달러를 초과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2027년부터 데이터를 공개하도록 했습니다. (단, Scope 3 배출량은 2028년부터 공개 대상)
많은 미국 기업들도 여전히 ESG 공시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Reuters Events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 상위 100대 기업 중 99%가 ESG 보고서를 발간하고 있고, 그중 88%는 외부 검증까지 받고 있습니다. 중견기업과 중소기업들도 ESG 보고를 이미 시작했거나 준비 중이며, 전체적으로 ESG는 기업의 브랜드 이미지, 투자자 신뢰, 장기 전략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많은 기업들이 ESG라는 용어 대신 ‘지속가능성’, ‘책임 있는 경영’ 등의 표현을 쓰면서 조용히 실천을 이어가고 있는데, 핵심은 보여주기보다 진짜 내용에 집중하겠다는 전략적 선택으로 보입니다.
이제 선택의 종착역에 도착하다.
한국의 금융위원회는 2021년 1월, 기업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공시를 단계적으로 의무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발표에는 2025년부터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를 시작으로, 2030년에는 코스피 전체 상장사로 공시 의무를 확대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23년 10월, 금융위원회는 기업 준비 상황과 글로벌 주요국의 공시 규제 동향 등을 고려해 상장 대기업을 대상으로 한 지속가능경영 공시 의무화 시기를 2026년 이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한국회계기준원 산하 지속가능성기준위원회(KSSB)는 2024년 4월 30일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의 공개초안을 발표한 뒤, 2025년 5월 ‘ESG 금융추진단 제5차 회의’를 통해 경제 전반의 불확실성과 글로벌 주요국의 공시 시기 및 의무대상 등과 같은 트렌드를 고려하여 공시의무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아직 대상 기업의 범위나 도입 시기 등 구체적 세부 사항이 확정되지 않아 한국의 ESG 공시 규제는 그 불확실성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거래소의 분석에 따르면, 2024년 기준 지속가능보고서를 공시한 코스피 상장사는 204곳으로 전년의 161곳에 비해 27%나 증가하였으며, 그 중에서 자산 총액 2조원 이상 상장사 중 63%가 보고서를 공시하였습니다. 이처럼 국내기업들도 공시의무화 제도 도입 여부와는 무관하게 자율적으로 지속가능보고서 공시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은 ESG 공시 제도의 도입 시점과 방향을 놓고 중요한 기로에 서 있습니다.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천천히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과, ‘글로벌 흐름을 따라 신속히 대응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는 상황입니다. 이제 제도의 도입 여부가 아니라, 어떤 속도와 방식으로 도입할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상장회사의 지속가능성 보고서 공시를 신속하게 추진할 계획이며, 이와 관련하여 ‘(가칭)기업의 ESG 도입 및 확산 지원법’을 제정할 방침입니다. 이에 따라 한국도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조만간 공시 지연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입니다. 앞으로 ESG 공시가 단지 기업에 부담만 되는 규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기업 경쟁력을 함께 키우는 지속가능경영의 본질을 실천하는 전략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됩니다.